노신 (1881-1936), 저쟝 소우싱 사람 . 우리나라 현대의 위대한 문학가 , 사상가이고 혁명가이다 . 노신의 성은 주씨 , 이름은 수인이고 호는 예재이다 . “ 노신 ” 이란 이름은 원래 5.4 신문화운동 후에 쓰던 필명의 하나였는데 그 영향이 날로 퍼지자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노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.
노신은 1881 년 9 월 25 일에 소우싱 두창방구의 한 봉건 사대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. 7 세에 계몽교육을 받았고 12 세에 삼미서옥에서 공부한 그는 부지런하고 묻기를 즐겼다 . 기억력이 비상하고 아는 것이 많았으며 과외 시간에 야사를 탐독 필기하고 민간문학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회화예술에 짙은 흥미를 보였고 이때부터 문화적 토대를 단단히 닦았다 . 그는 사서오경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면으로 과외독물을 구해다 보았으며 역사 , 문화 지식을 습득하기에 열중하였다 . 소우싱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, 더욱이는 월나라 현인들의 도덕을 논한 저서들은 노신의 사상형성에 영향을 미치었고 사상을 훈도하였다 . 노신의 소년시절에 그의 조부는 과거시험사건으로 투옥되었고 부친 또한 병고로 별세하였기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. 노신은 봉건 사대부 대가정의 큰집 장손으로부터 몰락호의 자제로 전락되었다 . 가정의 일련의 큰 변고로 하여 소년 노신은 세정의 성쇠 , 인정의 변더스러움과 , 세상물정을 포착하게 되었고 봉건사회의 부패와 몰락을 견습하게 되었다 .
1898 년 봄 , 노신은 인생의 새 희망을 가슴에 안고 고향을 떠나 난징 강남해군학당에 입학하였다 . 이듬해에 그는 “ 암흑하기로 뒤죽박죽인 ” 학당의 현실에 불만을 느끼고 강남육군학당 부설 광무철로학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. 노신은 유럽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섭렵하면서 《 시사보 》 를 열독하고 《 천연논 》 을 읽었다 . 하여 유신 신사조와 진화론 학설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“ 미래는 과거를 초과하며 젊은이는 늙은이를 능가한다 .” 는 사회발전관을 초보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.
1902 년 , 노신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당을 졸업하고 정부측 파견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. 그는 먼저 도꾜 홍문 학원에서 일어를 배우고 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다 . 자산계급 민주혁명 사조의 물에 깊이 들어 반청혁명의 물결 속에 적극 투신하였다 . 과외시간에 “ 모임에 가고 서점으로 드나들고 집회에 참가하고 강연을 들으며 ” “ 자기의 피로써 두자성을 권하리라 ” 는 맹세를 하였다 .
1906 년 , 노신은 사실 앞에서 국내 동포들의 우매함을 보아내고 국민성을 깨우침이 중요함을 느끼었다 . 그는 결연히 의학을 버리고 문학예술을 선택하여 인생길에서의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. 바로 문필을 자기의 나라와 국민을 구하려는 전투적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. 그는 문예잡지 《 신생 》 창간 준비에 몸담그었다 . “ 인간의 역사 ”. “ 과학사 교편 ”, “ 문화편파논 ”, “ 모로시 역설 ” 등은 조기 그의 중요한 논문이다 . 노신은 이렇게 인정하였다 . 중국의 엄중한 문제는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으며 ,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으며 , “ 뭇사람 ” 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성에 있다 . “ 나라를 건지려면 ” 먼저 “ 사람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.” “ 사람을 바로 하는데서 ” 의 기본 고리는 개성의 각성과 정신적인 분발이다 .
신해혁명 전야에 노신은 조국으로 돌아왔다 . 그는 먼저 항저우 사범학당에서 화학 , 생리학 교원으로 있다가 후에 고향 소우싱에 돌아와 소우싱 중학당 교감 겸 박물 교직에 있었고 산회 초급사범학당 교장에 임하였다 . 그는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청년들을 양성하는 한편 신해혁명에 적극 투신하였고 고향의 문학동아리 “ 월사 ” 를 지도하여 《 월택일보 》 의 창간을 지지하였다 .
1912 년 초에 노신은 교육 총장 채원배의 초청으로 난징임시정부 교육부에 임직하였다 .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부를 따라 북경으로 향발하여 사회교육사 제일과 과장직에 임한 동시에 선후로 베이징대학 , 베이징 고등사범학교 , 베이징 여자고등사범학교 등 고등학교에서 겸직 강사를 맡았다 .
러시아 10 월 혁명이 승리는 노신을 크게 고무하였다 . 그는 리대소 , 진독수 등 당시 많은 선진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글을 쓰고 잡지를 꾸리면서 중국 신문화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. 그는 반제 반봉건의 선두에 서서 새 문화 , 새 사상 , 새 도덕을 적극 제창하였으며 몇 천 년래의 낡은 문화 , 낡은 사상 , 낡은 도덕을 날카롭게 공격하였다 . 1918 년 , 그는 우리 나라 현대 문학사에서의 첫 백화문 소설 《미치광이 일기》를 발표하였다 . 소설은 상징적인 예술수법으로 몇 천 년 중국 봉건 사회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본질을 사정없이 발가놓았으며 봉건적인 예의와 봉건종법제도의 죄악을 힘있게 공소하였다 . 이렇게 시작한 노신은 필을 멈추지 않고 철저하고도 비타협적인 자태로 《공을기》 , 《약》 , 《아 Q 정전》 등 여러 편의 소설과 잡문 , 수필 , 평론을 대량 창작하였다 . 이로부터 그는 5.4 신문화운동의 선구자로 되었고 중국 현대문학의 정초자로 되었다 .
1926 년 여름 , 노신은 북양군벌이 도사리고 있는 베이징을 떠나 샤먼에 남하하여 샤먼대학 중국문학학부 교수를 담임함과 아울러 국학원교수를 겸임하였다 . 1927 년 초에 노신은 당시의 혁명 중심인 광주로 전근하여 중산대학 중문학부 학부장을 담임하였고 또 교무주임을 겸임하였다 . 그는 교육직과 문학창작에 종사함과 아울러 새로운 전투에 투신하였다 . 같은 해 4 월에 반혁명정변이 일어나자 노신은 피의 시련을 겪었다 . 학생을 구원하는 일에 전력하였지만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결김에 사직하였다 . 피어린 교훈 앞에서 노신의 소년시절에 형성된 사회발전관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. 그는 진화론의 “ 편파적인 ” 것 만을 믿던 과거를 시정하고 자기의 사상을 엄하게 해부하였다 . 이로부터 그의 사상은 새로운 기점에로 접근하였다 .
1927 년 10 월 , 노신은 상하이에 정착하게 되었다 . 그는 혁명적 문예운동에 종사하는데 정력을 몰부었다 . 그는 중국 좌익작가연맹 , 중국 자유운동대동맹과 중국민권보장동맹 등 여러 혁명적 동아리모임에 참가하고 지도하였다 . 그는《전초》 , 《급류》 , 《맹아월간》등 여러 간행물의 주필을 맡고 광범한 혁명적 , 진보적 일군을 단결하고 이끌어 제국주의 , 봉건주의와 국민당정부 및 어용문인들과 날카롭게 맞서 싸웠다 . 그는 수백 편에 달하는 잡문으로 끈질긴 전투를 견지하였다 . 이런 잡문은 비수마냥 예리하여 반문화 “ 토벌 ” 에 특수한 기여를 하였다 . 그는 공산당인들과 거래가 잦았으며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나섰다 . 그는 자기를 “ 불 도둑인 ” 에 비유하고 중외문화교류에 진력하였으며 신흥목각 운동을 제창하였다 . 그는 청년들을 관심하고 양성하였으며 청년작가 성장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었다 . 1936 년 10 월 19 일 , 노신은 상하이의 대륙신촌 저택에서 별세하였다 .
노신은 시《자초》를 썼다 . 그 중 “ 매서운 눈초리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 숙여 달갑게 유자의 소가 되련다 ” 는 두 구절은 그의 일생에 대한 진실한 스케치이다 . 노신은 일생동안 800 여 만자에 달하는 저서와 역저를 출판하였다 . 《눌함》 , 《방황》 , 《공을기》 , 《들풀》 , 《조화석습》 등 그의 많은 작품이 세계 각지에서 거듭 재판되었는데 영어 , 로어 , 독일어 , 프랑스어 , 일어 , 한국어 , 세계어 등 여러 가지 문자로 번역 출판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향유하였다 . 《노신전집》은 그가 중국인민과 세계 각국 인민에게 남긴 귀중한 정신적 재부이다 . |